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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치마미 주말 여행

이응노미술관 <70년 만의 해후 : 이응노와 박승무> 관람후기 본문

교과서 여행

이응노미술관 <70년 만의 해후 : 이응노와 박승무> 관람후기

소담동 리치마미 2023. 7. 12. 12:05

2023 이응노 미술관 특별전 <70년 만의 해후 : 이응노와 박승무>

전시위치 : 이응노미술관 1,2,3,4전시실

전시기간 : 23. 4. 25. ~ 23. 8. 13.

관 람 료 : 성인 100원, 청소년·어린이 600원

출품작가 : 박승무, 이응노

 

<70년 만의 해후 : 이응노와 박승무>는 한국이라는 공간과 20세기 격변의 시대를 공유한 두 화가의 예술적 교감을 살펴보는 전시이다. 동양화의 현대성을 꾀하며 고군분투한 고암 이응노(1904~1989)와 전통회화를 고수하며 자신만의 개성을 발휘한 심향 박승무(1893~1980)는 작품 성향은 다르지만 서로를 정신적으로 존중하였다. 이응노미술관은 개성있는 두 화가의 작품세계를 살펴보고자 이번 전시를 기획하였다.

 

2022년 이응노연구소는 기록화 사업인 '아카이브로 보는 이응노와 대전'을 통해 이응노와 동양화 6대가 중 하나인 박승무가 교류한 사실을 재조명했다. 인연의 시작과 계기는 자세히 밝혀진 바가 없으나 당시 전주에서 간판점인 개척사를 운영하던 이응노는 개척사 내에 '심향선생화회 사무소'를 두고 1934년 7월 전주에서 박승무의 <심향화회>가 개최될 수 있도록 도왔으며, 박승무는 이에 대한 감사로 이응노에게 수묵산수 작품인 <첩첩운산>을 선물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서울과 전주를 오간 서신의 내용을 살펴보면 열한 살의 나이차이를 극복하고 이들은 예술가로서 서로를 진심으로 존경하며 지지하는 사이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945년 덕수궁에서 열린 <해방기념문화축전미술전>을 비롯해 각종 단체전에 함께 참여했던 기록과 목포에서 합작도를 제작한 사실 등은 두 화가의 만남뿐 아니라 광복 이후 해방공간에서 미술의 방향성을 찾기 위한 동양화단의 움직임과 그 의미를 주지시킨다.

 

이응노와 박승무의 교류를 되짚어 가는 이번 전시는 이들의 회화에서 나타난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하는 장이 될 것이다.  충청남도 홍성 출신의 이응노와 충천북도 옥천 출생의 박승무는 서울을 비롯해 전주, 대전, 목포 등지를 유랑하며 작업 활동을 펼쳤고 말년에는 각각 파리와 대전에 정착해 큰 족적을 남겼다. 특히 이응노와 박승무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자연에 대한 천착은 두 화가의 자연을 향한 긍정적 태도와 이러한 시선에서 투영된 인간과 자연이 상생하는 조화로운 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이들은 초기에 스승을 찾아가 배우는 방식인 도제식 교육을 받았지만 이러한 배움의 단계를 넘어 숙련기에는 서로 다른 양상을 보인다. 두 화가는 점차 모방과 관념적 세계에서 벗어나 현실의 풍경과 사물을 스케치하는 사생에 심취한다. 여기에서 더 발전해 이응노는 활발하고 자유분방한 운필의 역작을, 박승무는 찬찬하고 고매한 품격을 그림에 담아낸다.

 

이응노와 박승무의 마지막 교류 이후 70여 년이 흘러 두 화가는 이응노미술관 전시공간에서 작품으로 해후한다.

 

1부 소하(小霞) 그리고 심향(心香)과 심향(深香) 

- 소하 시기(小霞, 1912~1927년)

어린 시절 큰아버지에게 입양된 박승무는 미국 유학을 위해 YMCA에서 영어와 일본어, 유도를 배우던 중 소림 조석진에게서 그림을 배우고 있던 친구 심묘 김창환의 영향으로 그림세계에 눈을 뜨게 된다. 화가의 길을 반대하던 큰아버지도 박승무의 뜻에 따라 최초 미술교육기관이었던 서화미술회 화과 3회에 입학시키기도 했다.이후 심전 안중식, 소림 조석진 문하에서 소정 변관식, 심묘 김창환, 운전 조광준과 함께 공부하며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운다. 그 무렵 큰아버지는 박승무에게 소하(小霞)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

 

소하 시기는 수련기로 전통화법을 익히며, 다양한 필법을 구상하고 묘사하던 시기라 할 수 있다. 이후 버드나무를 태워서 만든 숯인 유탄을 이용해 대상을 관찰하고 사실적 스케치를 시작한다. 어린 아들이 세상을 떠난 뒤, 박승무는 1918~1920년 독립운동가인 외가 친척이 머물고 있는 상해로 가서 신한청년당과 교류하는데 이 사실로 일제의 감시 대상이 되어 훗날 국내 활동에 제약을 받는 계기가 된다. 상해에 머물던 시기에 그린 화조화는 주로 생계와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높은 금액에 거래되었다.

 

<도류촌심, 1926, 종이에 수묵담채>
<화조괴석, 1934, 종이에 수묵담채>

- 심향 시기(心香, 1927~1940년경)

상해시절 독립지사와 만난 일로 중국에서 강제 추방당한 박승무는 1920년부터 1922년까지 고향 옥천으로 주거가 제한되었다. 이후 상경하여 1927년부터 독립운동가이자 서예가로 활동한 위창 오세창이 지어준 심향(心香)와 심향(深香) 두 개의 호를 병용한다. 

 

심향 시기(心香)는 본격적으로 전통화법에 따르되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현해 가는 모색기에 해당한다. 쌀알 모양의 점을 여러개 찍어서 그리는 동양화 기법인 미점준을 그 이전보다 더 적극 활용해 주변의 산천을 주제로 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 후에도 박승무는 산수화에서 사용하는 세 가지 종류의 투시법인 삼원법 구도를 사용하고 산과 나무를 섬세하게 그리며 기본에 충실한 점묘적 화풍을 지켜 나간다.

 

<첩첩운산, 1934, 종이에 수묵>
<매립유거, 1930, 종이에 수묵담채>
<매작도, 종이에 수묵담채 >

- 심향 시기(深香, 1940~1980년)

박승무는 화훼영모화에 능하기도 했지만, 변화하는 사계산천을 그린 그림으로 유명하다. 그의 고향인 옥천의 정서뿐만 아니라 그가 늘 오갔던 대전과 광주, 목포 등 남해의 풍경이 주제로 등장한다. 박승무가 그려낸 산수화에는 노인과 아이 등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관념적인 인물의 모습도 종종 등장하는데, 이는 박승무가 그리는 심상이 선경이었기 때문이다. 박승무의 산수 가운데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는 산촌의 풍경을 소담하게 표현한 설경은 겨울 풍경 속에서도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사계산수, 1944, 종이에 수묵담채>
<도류춘심, 1959, 종이에 수묵담채>
<설리강산, 1958, 종이에 수묵담채>

2부 죽사(竹史) 그리고 고암(顧菴)

고암 이응노(顧菴, 李應魯, 1904~1989)는 호에 따라 두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죽사 시기(竹史, 1923~1940년대 중반)와 고암 시기(顧菴, 1940년대 중반~1989년)이다. 유럽으로 건너간 1958년 이후 이응노의 작품에는 고암이라는 호보다 LEE UNGNO, LEE(李) 등 영문 이름이 서명으로 자주 등장한다.

 

- 죽사시기(竹史, 1923~1940년대 중반)

1904년 홍성에서 태어난 이응노는 그림을 그리는 일을 만류하는 부모님을 떠나 서울로 향한다. 해강 김규진을 스승으로 모신 이응노는 1923년 무렵 그에게서 '대나무처럼 항상 푸르라'는 의미의 죽사(竹史)를 호로 받는다. 그 후로도 고려미술원 연구생으로서 이병직에게서도 묵죽 양식을 배우며 전통 서화를 습득했다. 이후 일본의 가와바타화학교와 혼고회화연구소에서 동양화와 서양화를 두루 배우며 신남화를 체득한다. 

 

이 시기 이응노는 국내의 서울, 대전, 공주, 홍성, 부여, 논산뿐만 아니라 일본의 도쿄, 나가노, 하코네 등을 순례하며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자연풍경을 포착했다. 이때 얇은 붓으로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을 관찰해 그려내며 원근법을 도입했다. 이응노의 그림에 나타난 호를 살펴보면 1939년부터 1940년대 중반에는 죽사(竹史)와 고암(顧菴)을 병용한다.

 

<위 : 결혼도, 1940년대 초 좌 : 정물화, 1944년 우 : 민충정공절죽도, 1947년>
<공주산성, 1940년>
<홍성 월산하, 1944년>

- 고암 시기(顧菴, 1940년대 중반~1989년)

1939년 한학자 규원 정병조는 화가 고개지와 같이 항상 새로운 것을 계속 발견하라는 의미에서 고암(顧菴)이라는 호를 내려주었다. 이응노는 실물과 경치를 관찰하고 탐구해 이를 자신만의 조형언어로 해석하고자 했는데, 이때 "사생을 착수하기 전 먼저 주위의 분위기를 잘 살펴 주체적인 물체에 정신을 집중시킨 후, 하나 하나의 물체에 주력"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195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응노의 작품에서는 보다 간결한 필치의 추상성이 강조된다. 이응노는 자연물을 그릴 때 화면의 먹 농담, 구도, 공간 구성 등을 염두에 두고 동시에 자연을 연구하는 미학 개념도 중요하게 여겼다. 자연의 모습을 똑같이 따라 그리는 일에 전념하는 것을 경계하되 자연을 느끼고 대화하며 그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고자 했다.

 

1958년 말 유럽으로 떠난 이응노는 프랑스를 기반으로 작품 활동을 하며 종이콜라주와 문자추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는데, 1980년대에는 평화의 염원을 담은 <군상> 연작을 선보였다. 한편 1964년 파리에 '동양미술학교'를 설립해 수묵화와 서예를 가르치는 등 제자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좌 : 군마, 1983년 우 : 황소, 1926년>
<좌 : 당인리 발전소, 1969년 우 상 : 서강풍경, 1950년대 중반 우 하 : 서강, 1956년>

 

※ 이응노미술관

 - 주소 : 대전 서구 둔산대로 157

 - 관람시간 : 화~일 10:00~19:00 매주 월요일 휴관, 문화가 있는 날(매월 마지막 수요일) 무료관람

 - Tel : 042-611-9800

 - leeungnomuseum.or.kr